쌀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산지 쌀 재고는 산더미처럼 쌓여 좀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쌀값은 끝없는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신속한 대책을 촉구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지만 양정당국은 손을 놓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올해 햅쌀에까지 심각한 파장이 미쳐 국내 쌀 생산기반이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벼 매입량 사상 최대치…전국 농협 재고 115만t 달해
판매 부진·쌀값 지속 하락…2022년산 출하땐 산지 부담 가중
RPC 적자·쌀산업 핵심기반 ‘흔들’…계획물량 전량 격리해야
야적장까지 넘쳐나는 벼포대
경북 최대 규모의 미곡종합처리장(RPC)을 운영하는 예천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은 3월말 현재 재고 물량이 1만4000t에 달한다. 올들어 1400t을 추가 매입한 데 이어 앞으로 지역농협 보유 물량을 더 떠안을 수도 있다. 이미 물량적체가 한계에 달해 있는데 물량이 더 늘면 최악의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벼 건조저장시설(DSC)을 운영하는 충남 태안 안면도농협(조합장 전용국)도 지난해 가을 매입한 벼 8000t 중 아직 팔지 못한 6500t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이 가운데 650t은 사일로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비닐과 차광막에 덮인 채 야적돼 있다. 야적 한계선인 4월말이 코앞에 닥쳤지만 언제 벼를 처분할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용국 조합장은 “예년에는 벼를 5000∼6000t 매입했는데 지난해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농민들을 위해 매입량도 늘렸다”며 “하지만 RPC들의 쌀 판매가 줄고 값도 떨어지면서 벼를 파는 게 매우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전국 지역농협들이 벼와 쌀 문제로 비상이 걸렸다. 지난해 가을 벼 매입량을 크게 늘렸는데 올들어 쌀 판매는 줄어 재고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농협경제지주에 따르면 지난해 RPC 운영 농협과 비RPC 농협은 총 193만5000t의 벼를 매입했다. 쌀 생산량이 적었던 2020년(142만2000t)보다 많은 것은 물론이고 예년보다 크게 늘어난 사상 최대 물량이었다.
산지 물량 적체 위험수위
매입량은 늘었으나 소비가 제대로 안되다보니 산지 물량 적체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농협경제지주에 따르면 2월말 기준으로 전국 RPC 운영 농협과 비RPC의 벼 재고량은 115만8000t으로 전년 동기 대비 60.8%(43만8000t)나 많다. 2022년산 신곡이 본격 출하되기 전인 8월말 재고는 23만t에 달할 전망이다. 2021년 8월말(15만4000t)에 견줘 49.3% 많은 양이다.
농협의 2021년산 쌀 매입량이 예년보다 많았다고 해도 불과 4∼5개월 뒤면 조생종 햅쌀이 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재 산지 물량 적체 문제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비단 농협RPC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부 농가들도 미처 팔지 못한 벼를 창고에 쟁여두고, 마당에 야적하고, 심지어 육묘장에까지 쌓아놓고 있다. 개인 육묘장에 40㎏ 조곡 1만4000포대를 쌓아둔 이재후씨(60·전남 고흥군 동강면)는 “조생종 벼를 육묘하려면 1∼2주 안에 육묘장을 비워야 하는데 이 시기까지 벼를 못 팔고 가지고 있는 것은 40년 농사지으면서 단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며 한숨지었다.
산지 쌀값 끝없는 내리막길
산지마다 물량이 넘쳐나다보니 쌀값은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다. 쌀 잘 팔기로 유명한 충남 당진해나루쌀조합공동사업법인(대표 박승석)도 계속 하락하는 쌀값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했다. 박승석 대표는 “연초 판매가격과 비교하면 최근 20㎏ 한포대당 3000원 정도 떨어졌고, <삼광> 품종 역시 3000원이나 하락했다”고 밝혔다. 박 대표는 “해나루쌀조공법인이 이 정도면 다른 RPC는 말할 것도 없다”며 혀를 찼다.
쌀값 하락 문제는 어느 지역도 예외가 없다. 이문균 전남 보성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는 “지난해 가을 수확기 이후 단 한번도 반등해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전남지역의 경우 산지가격이 최근 4개월 새 20㎏ 정곡 한포대당 1만원이나 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조곡도 40㎏ 한포대당 6000원 정도 손실이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망도 어둡기만 하다. 벼 매입자금 상환 압박으로 농협들이 더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쌀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아 가격 하락이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팽배해 있다. 채희진 전남 강진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는 “민간 도매상들이 RPC나 농가에 수시로 전화해 경쟁적으로 가격 하락을 부채질하니 값이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극에 달해 있다”고 말했다.
한술 더 떠 소비지 대형 유통업체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쌀 소비감소 등을 이유로 들어 산지에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쌀값 추가 하락을 부추기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용경 전남 장흥 정남진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는 “산지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쌀값에 가슴이 무너지는데 소매가격은 20㎏ 한포대에 5만2000원가량으로 작년과 별 차이가 없는 걸 보면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산지쌀값은 20㎏들이 한포대에 4만9904원(80㎏당 19만9616원)까지 떨어졌다. 5만원선이 무너진 것이다. 앞으로 더 떨어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4만8000원까지 주저앉을 것으로 내다봤다.
눈덩이 적자에 RPC 경영 휘청
물량 적체로 인한 쌀값 하락은 국내 쌀산업의 핵심 기반시설인 농협RPC와 DSC 경영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조현웅 예천군농협쌀조공법인 장장은 “현재 재고물량만 감안해도 최소 10억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는데 올들어 지난해보다 재고량이 4000t 더 늘어난 데다 추가적으로 3800t의 재고부담을 더 떠안을 수도 있어 앞으로 적자폭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전용국 안면도농협 조합장은 “여기저기 죄다 벼가 넘쳐나는 상황이라 지난해 매입값보다 3500원 정도 낮은 값에 팔아야 하는 실정이라 손실이 큰 걱정”이라며 “올해 적자가 약 7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더욱이 쌀값 하락세가 멈추지 않고 단경기까지 이어진다면 올가을 햅쌀 시세에도 악영향을 미쳐 큰 폭의 농가소득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된다. 오호태 대구·경북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운영협의회장(남포항농협 조합장)은 “현재 농협의 적자는 불 보듯 뻔한 일이고,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추석에 출하될 햅쌀 가격 또한 악영향을 받아 농가소득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다른 물가는 다 오르는데 쌀값만 떨어지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나서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전국 RPC 운영 농협과 비RPC의 적자가 무려 800억원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수급안정 위한 특단 대책 시급
산지에 위기감이 확산하면서 시선은 정부로 향하고 있다. 양준섭 전북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운영협의회장(순창 동계농협 조합장)은 “3월 현재 격리물량(14만5000t)은 계획물량(27만t)의 절반에 그쳐 농가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면서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계획물량 전량을 격리시키고 또 시장 상황을 지켜본 후 그래도 가격 안정이 되지 않을 경우 10만t을 추가 격리해 쌀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현웅 예천군농협쌀조공법인 장장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추가 격리가 이뤄져야 한다”며 “만일 새 정부 출범 이후로 추가 격리를 생각한다면 큰 오판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농민단체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종수 한국쌀전업농 충남도연합회장은 “농민들은 벼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헐값에라도 벼를 팔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투매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며 “현장 농민들이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데도 정부는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2차 시장격리를 조속히 시행하라는 요구에는 귀를 막고 팔짱만 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회장은 “2차 시장격리를 하루속히 실시하되 1차 때와 같은 최저가 낙찰 방식이 아닌 가격을 정해놓고 해야 어렵게 회복한 쌀값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시장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한 생산조정제 요구도 나오고 있다. 홍의식 한국쌀전업농 경북도연합회장은 “역공매 최저가 입찰의 정부 격리 방식으로는 추가 격리가 이뤄지더라도 쌀값 반등은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시·군에서 논 타작물재배 지원사업(쌀 생산조정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자체가 아니라 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정책적 지원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태안·아산=서륜, 보성·고흥·강진=이상희, 안동·예천·포항=김동욱, 순창=박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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